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나의 점수 : ★★★☆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의 뒤를 이어 읽게 된 두 번째 수필:) 채소의 기분을 상당히 기분좋게 읽었기 때문에 이번 책도 기대된다. 하루키 수필에 점점 길들여지는 것 같음.
다른 두 권에 비해 제목이 평이하다. 개인적으로 하루키 수필 아니었으면 절대로 읽지 않았을 것 같은 제목이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라,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남자들은 보통 면도를 언제 하려나. 외출하기 전에 하려나? 저녁에 해봤자 자고 일어나면 또 길어져 있을 테니까.
그럼 저녁에 면도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저녁에 외출을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고, 외출과 관계없이 자신을 가꾸는 행위로서 면도를 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어느 쪽이려나.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향일 수도! 어떤 내용이든 담백하고 맛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목차를 보니 이번에도 흥미로운 제목이 많다. 영양가 있는 음악, 버지니아 울프는 무서웠다, 크로켓과의 밀월, 사람들은 왜 지라시스시를 좋아하는가, 작은 과자빵 이야기, 골동품 가게 기담 등등. 역시나 음식의 비중이 높다ㅋ 과연 만년 다이어터 하루키 답다(!) 사람이 건강챙긴답시고 무미건조하게 살다보면 저런 것에 정신이 쏠리게 마련ㅠ
한 번쯤은 하루키가 음식에 대해 각잡고 수필썼으면 좋겠다. 보는 내내 침 질질, 꼬륵꼬륵, 행복할 듯.
*
잘 읽었다. 하지만 먼저 읽었던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보다는 좀 덜 신박했다고 해야 하나. 몇몇 표현은 피부에 착착 달라붙을 정도로 좋긴 헀는데, 전반적인 신박함은 채소의 기분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채소의 기분을 먼저 읽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ㅠ
채소의 기분이 잘 담근 쯔케모노라면, 이 책은 고슬고슬한 쌀밥이랄까. 특별히 인상에 남는 에피소드나 신박하게 다가온 발상은 없지만, 포만감은 확실한 수필집이다. 그리고 채소의 기분에 비해 덜 신박하게 느낀 거지, 이 책 자체만 봤을 땐 굉장히 좋다.
굳이 두 책의 차이를 더 구체적으로 따져보자면, 채소의 기분은 좀 더 독기가 빠지고 유한 느낌이라면, 이 책은 아직 독기가 살아있는 느낌? 중간 중간 날카로운 문장이 많아서 좀 놀랐다. 하루키도 사람이구나 싶었던. (..)
아래 구절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p.35 그러나 그곳에 있었던 죽음의 감촉은 아직 내 안에 선명히 남아 있는 탓에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언제나 그 작은 비행기 안에서 본 풍경이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아니, 실제로 그때 나의 일부는 죽어버렸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맑은 로도스 섬 상공에서, 아주 조용히.
p.87 강아지는 어째서 어째서 강아지는 부드러울까? 강아지를 코트 속에 품고 걸어 볼까요. 강아지 강아지 꼬맹이 어째서 강아지는 부드러울까?
p.99 갓 튀겨낸 도넛은 색깔이며 향기며 씹었을 때 바삭한 식감이며, 뭔가 사람을 격려하는 듯한 선의로 가득 차 있다. 많이 먹고 건강해집시다. 다이어트 따위, 내일부터 하면 되잖습니까.
p.106 상당히 문제가 있는 인간이 상당히 문제가 있는 소설을 쓰고 있으니, 누군가 뒤에서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얼마간 마음이 편해진다. 인격이나 작품에 대해 아무리 비난을 받아도, "미안합니다. 원래 상당히 문제가 있어서요"하고 마음 편이 대응할 수 있을 것 같다.
p.136 나는 화면을 일단 잊고 옆으로 돌아앉아 한가로이 문고판 책을 읽는다. '넌 너 좋을 대로 해. 나도 내 좋을 대로 할 테니까'하는 식으로.
p.167 내기해도 좋은데, 아침 6시 무렵 한 마리의 아름다운 매와 조우하는 것만큼 멋진 하루는 좀처럼 없을 것이다.
p.184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넌 위선자야"라는 비판에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난 위선자가 아닙니다!"라고 당당하게 반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나는 반론할 수 없다. '듣고보니 내 안에 위선적인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라고 생각할 것이다.
p.187 인간이란 칭찬에 부응하고자 무리하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본래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이유 없는 (혹은 이유 있는) 험담을 듣고 상처를 입더라도, "아, 잘됐어. 칭찬받지 않아서 다행인걸. 하하하"하고 넘겨보시길. 물론 그렇게 생각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지만.
p.194 별로 선호하지 않는 체중계는 위에 올라서면 삐삐삐 디지털로 표시해주는 최신 제품. 외형도 스마트하고 숫자도 읽기 쉽지만 왠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 속에 악질 난쟁이가 들어앉아 하품을 하며, "이녀석은 좀 무거운 것 같으니까 72킬로그램으로 해버리자"하고 키보드로 적당한 숫자를 탁탁 처넣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데 아주 의심이 많은 성격이다.
책을 읽기 전에 궁금해했던,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의 의미는 대략 '저녁의 면도는 아침의 면도와 달리 일상의 일부가 아니라 특별한 일정을 위한 것이기에 기분이 좋다.'였다. 일상이 비일상으로 전환되는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을 뜻하는 듯:) 말 드럽게 현학적인데 ㅋㅋ 요지는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무라카미 라디오도 한 권 남았다. 매권 읽기도 가볍고 내용도 좋아서 원서로 구해볼까 생각 중이다. 그리고 영원히 안 읽을 것 같지만, 뭐 상관없지 않을까요? (하루키 말미ㅋ)


최근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