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나의 점수 : ★★★★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는 엮어서 감상을 쓸까 했는데, 그냥 따로따로 쓰기로 했다. 시리즈라고 할만큼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소소한 에세이들을 엮어 만든 책이라 그냥 한 권씩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체크하는 정도로 읽으면 될 것 같다.
일단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빨간 책방(..)이고, 예정대로라면 다자키 쓰쿠루부터 읽어야 하지만 왠지 에세이가 읽고 싶어져서 즉석에서 데려왔다. 따끈따끈한 책이다. 1권 격인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는 어떤 사람이 빌려간 관계로 2권부터:(
저자가 무라카미 하루키인 걸 염두에 두지 않고 책 자체만 봤을 때는, 일단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 개인적으로 제목만 봐선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는 글이 좋다. 그냥 끼워 맞춘 것 같으면서도 막상 읽어보면 내용이 잘 맞아떨어지는 글이 좋다. 처음 두 파트만 읽었는데, 딱 그런 책인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사실상 처음 읽는 하루키 에세이집이기도 하다. 하루키는 늘 소설만 읽었는데, 에세이로 읽으니 왠지 펜팔하던 사람을 실제로 만나는 것처럼 어색한 기분이다. 그만큼 내용이 무척 소박하다. 장황한 허구와 섬세한 일상을 오가는 하루키 소설을 생각하면 신기할 정도. 읽고 있자니 나도 왠지 에세이가 써보고 싶다.
흔히들 하루키는 에세이가 진국이라고 말하는데, 개인적으로 하루키의 몽환적인 작풍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에세이는 어떻게 읽힐지 기대된다. 약간 걱정되기도 하고(?) 아무튼 담백한 표지와 독특한 제목이 매력적인 책이다. 담백함과 밋밋함은 다른 거라는 걸 표지에서부터 느끼는 중. 소박하게 담근 쯔케모노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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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좋다. 크게 감동받은 건 아니지만 되레 그 소소함이 부담없이 다가온 책이다. 솔직히 내용은 정말 별 것; 없다. 다른 작가들의 에세이에서 보이는 번뜩이는 통찰도 눈에 보일 듯 말 듯 하다 알아서 소멸하는 느낌이고, 소재도 한없이 평범하다. 하지만 그 미지근함이 좋다.
소박하게 잘 담근 쯔케모노가 맞다. 간이 진하지 않은 데도 맛있다. 내 생활도 덩달아 하루키처럼 풍성해진 느낌이다. 나는 아무래도 냉철한 독기로 현실의 껍데기를 벗겨내는 에세이보다, 약간의 버터를 둘러 생활에 풍미를 더하는 에세이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인상적인 구절이 몇 개 있어 적어본다.
p.24 모두에게 좋은 얼굴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인생의 대원칙이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이고, 독자에게 최선의 얼굴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으면 그 이외의 부분은 "미안합니다"하고 잘라버릴 수밖에 없다.
p.35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너무 화내지 말고 적당히 넘겨주시길. 무라카미도 무라카미 나름대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p.72 나쁜 뜻은 없었는데 왠지 답장을 못 쓰겠더군요. 난데없는 뒷산 원숭이 같은 놈이라 여기고 이해해주십시오. 다음에 도토리를 모아서 갖고 오겠습니다.
p.88 내가 대학생 때 '서른 넘은 놈들을 신용하지 마라'라는 말을 흔히 들었다. 어른을 믿지 마라, 하는 의미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말을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걸까? 자신도 머잖아 틀림없이 서른이 될 텐데 말이다.
p.112 "이제 아줌마가 다 됐네"라고 말하는 순간(설령 농담이나 겸손이었다 해도) 그 사람은 진짜 아줌마가 돼버린다. 일단 입 밖에 낸 말은 그만한 힘을 발휘한다. 정말로.
p.180 독자를 염두에 두려고 해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귀찮은 것은 차치하고 어쨌든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기, 그것만 명심하고 있다. 너무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미안합니다.
p.182 주먹밥으로 말하자면 엄선한 쌀로 정성껏 지어서 적당한 힘을 주어 간결하게 꽉 쥔다. 그런 식으로 만든 주먹밥은 누가 먹어도 맛있다. 글도 마찬가지여서 그것을 제대로 '쥐기'만 하면, 거기에 담겨 있는 마음은 성별이나 연령의 차를 넘어 비교적 쉬이 전해지는 게 아닐까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잘못됐다면 죄송하지만.
첫 에세이를 읽고 나니, 하루키의 성격을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다. 매사에 굉장히 느긋하고 복잡한 문제에 대해선 해탈(?)한 사람인 듯. 어떤 분야에서 오래 있었던, 혹은 나이가 든 사람들은 대개 이런 스타일로 변모하는 것 같다.
난 매사에 조급하고 복잡한 문제에 그대로 휘말리는 타입이라, 이런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다. 나도 소소한 에세이를 써버릇하면 이런 기질을 키울 수 있으려나? 왠지 진지하게 에세이가 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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